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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k444 2025. 4. 29. 02:02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31 (명륜3가)에 위치한 조선의 국립고등교육기관이자 최고학부이다.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이 모셔진 유교의 사당인 문묘도 함께 있다. 면적은 81,673㎡. 태학(太學), 문묘(文廟), 반궁(泮宮)[3] , 행단(杏壇)이라고도 한다. 1964년 11월 10일 사적 제143호로 지정[4]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서울 문묘와 성균관(Seoul Confucian Shrine and Seonggyungwan National Confucian Academy)'이다. '성균관'에서 '성균(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 라는 말의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이다.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매년 봄과 가을마다 유교의 성현들을 제사하는 석전대제가 거행된다. 이 때 한국에서 유일하게 팔일무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에 비견되는 문묘제례악이 정기 연주되는 장소다. 성균관 문묘지례악은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문화대혁명으로 실전된 공묘의 제공대전을 가까스로 재현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성균관은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격하되었고 1943년에는 그마저 폐교당했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5]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6] 같은 해 11월 김창숙이 전국유림대회를 열어 전국에서 천여명의 대표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으며, 김구가 위원장을 이승만이 고문을 역임했다.[7] 이 자리에서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전국 유림들이 기부금을 모았으며 학봉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였다. 이후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고,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 초대 총장 및 성균관장으로 취임했다. 1953년에는 종합대학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63년 사학법 시행 이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다.[8] 성균관대는 전통성에 눈독 들이던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재단 이사장을 맡아 대학을 지원했고, 1979~1991년에는 봉명재단이 운영했다. 이후 장을병 총장 시절 다시 삼성측에 연락을 취했고, 1996년 이건희 회장 시절 삼성그룹이 다시 재단에 참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9]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 문화 전문 교육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성균관은 성균관대 학생들에게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장소이기도 한데, 고즈넉한 학내 분위기를 조성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캠퍼스 확장에 장애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